< 카니발헤드 : Carnivalhead > 

 

카니발헤드 시리즈는 축제화 된 죽음을 그린다. 과거부터 이어진 가면축제나 요즈음의 할로윈 코스튬까지 축제 속 모습들은 신화적 기원이나 종교성이 사라지고 세속적 의미로 변이되었지만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나 변장을 통해 일상성이 감춰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은 동일하다. 축제 속에서 ‘타자성’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히 본래의 모습을 가린다는 것을 넘어서서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카니발헤드 시리즈는 동시대 사람들의 절제되지 않은 욕망과 파편화 되고 무질서한 삶을 해체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가면과 코스튬 속 신화와 전설, 동물 흉내, 그리고 온갖 대중문화의 코드들을 뒤섞어 다양한 인물 군상을 그려낸다.

 

모든 축제의 형식은 해방된 모습과 함께 일상적인 생활 질서나 제약, 금기, 구속과 제재가 일시적으로 제거된다. 이번 시리즈 역시 이전 작업에서 보이던 형식적 제약이나 스스로 정한 일정한 룰에서 벗어나 물질적이고 해체적인 물감의 사용, 과도할 정도의 색채, 그리고 미술사에서 차용했던 형상이나 아이콘을 내 식대로 전복시킨다. 두꺼운 회화사의 권위를 뒤집어 위와 아래, 앞과 뒤, 엄숙함과 불경함을 뒤섞는다. 그러나 이것은 질서나 권위를 조롱하는 의미보다는 극적으로 대립하는 것들의 공존을 위함이다.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레스크의 핵심처럼 카니발은 긍정하기 위해 부정하고, 존중하기 위해 조롱하며, 올라오기 위해 내려간다. 궁극적으로 ‘카니발 속에서 삶은 죽음을 내보이고 죽음은 또 삶을 내보인다.’ 

 

따라서 미술사 속 혹은 대중문화 속 온갖 상징들은 한데 뒤섞이고 이는 패러디와 오마주를 넘나들며 화면 안에 짓이겨진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적으로 보이는 추상적 붓질들로 얼기설기 겹쳐져 바득바득 그림이라고 소리치는 와중에 절묘하게 엮어져 떠오른 형상(figure)들이다. 형상의 어원이(figura) 귀신인 것처럼 그림 속 인물들은 해체되었으나 다분히 물질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 죽어있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세 가지 시리즈 모두 ‘죽음’이라는 주제에서 출발했지만 카니발헤드 시리즈는 완결되지 않은 현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원할 것 같고 완전한 것 같은 회화의 모습이 아닌 보다 드로잉적이고 자유로우며 제멋대로인 듯한, ‘완성’이라는 말이 무색한 그림의 상태를 추구한다.

 

 

 < 검은 장막 : The Black Curtain > 

 

한낮의 바쁜 현실이 지나고 밤이 찾아와 침대 위에 누우면 현재의 경험들과 과거의 실수, 잘못들 이 뒤섞여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그 중에서도 과거의 실수와 잘못은 눈꺼풀 아래에서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반복 재생된다. 다행히 잊었다 한들, 무의식의 장난인지 혹은 경고인지 알 수 없는 악몽을 통해 재연되기도 한다. 검은 장막 시리즈는 한국 사회 속의 역사적 죽음과 관련된 사건들을 다룬다. 역사적 사건들의 망각과 무지, 혹은 의도적 무관심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사람들의 의식 저편에 묻혀 변형되고 왜곡된 채 유령처럼 되살아나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는 역사의 눈꺼풀 뒤로 숨어 들어가, 억지로 숨겨 놓은 화석화 된 유령들을 눈앞으로 끄집어 낼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비로소 잃어버린 것과 잊었던 것과 찾아야 할 것,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반은 난민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나의 친할아버지도 고향인 황해도를 떠나 서울에 정착하여 내 아버지를 낳았다. 당시 북에서 관리직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총살형에 처해질 위기였기에 남쪽으로 도망쳐 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열두살 때 함께 낮잠을 자던 당신 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을 발견한다. 무척 고된 세월을 보내셨으리라. 이처럼 거대한 비극의 파장은 셀 수 없이 많은 개인사를 진동시키며, 직접 겪은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의 차이를 혼재하게 만든다. 나는 그 진동들을 잊히고, 퇴색되고, 중첩된 현재의 상태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다. 검은 장막 시리즈는 한국 사회가 지닌 컴플렉스와 트라우마의 이면에 존재하는 초상이면서 동시에 풍경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풍경은 과거의 모습을 띠고 있으나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끊임없이 따라붙는 현재의 그림자이다. 나는 역사적 사건의 트라우마들을 마치 연극 무대 위 핀 조명을 받은 배우들처럼 캔버스 위로 불러내고, 과거와 현재, 사실과 기억이 중첩된 어딘가에 이들을 세워둠으로써 내 눈꺼풀 뒷면의 풍경을 생생히 옮겨내고자 한다. 

 

 

 

 < 페이싱 : Facing >

 

 거울에 비친 모습을 가만히,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낯설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게 나 인가? 왜 이게 나지?’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는 거울을 응시하는 자아의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 는 순간의 경험이다. 물질정보로서의 인체 표본과 그것을 바라보는 개별적인 인간들의 충돌된 풍경 이면에도 그러한 응시가 담겨있다. 그들은 눈 앞의 해부 표본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물질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죽음을 바라보고, 나아가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화면 속 대상들의 관계는 회화를 바라보는 관람자와 회화를 대하는 나의 시선 과도 맞닿아있다. 그 시선의 본질은 철저히 뭉개지고 가려져있으며 명료한 것은 오직 바라보는 행위 그 자체뿐이다. 이것은 회화를 감상하는 관람자의 시선과 회화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시선이 충돌되는 순간에 대한 알레고리적 풍경이다. 해부학이 인간을 오로지 육체라는 물질적인 부분으로서 연구하고 내부 구조를 조사하는 것이듯, 시리즈는 과거 미술사에서 보여지는 형식을 차용하여 중세미술의 메멘토모리(memento mory)와 17세기 바니타스(vanitas) 회화의 모티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려는 회화사적 모색이기도 하다.